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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마거릿 무어 외 엮음 / 유은영 역  나무심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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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순간을 사는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친구들이여, 삶이란 더 '나아져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은,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이 신의 얼굴입니다. 미래의 어느 날에 일어날 것을 게속 기다린다면 여러분은 단지 더 많은 내일과 더 많은 먼 훗날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오늘이 바로 매일이며, 이날이 바로 모든 날들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 pp.120~121

 

사랑이란 여러분의 어떤 행동이나 생각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여러분이 자신을 통해, 그리고 자기 주변에 일어나도록 허용한 에너지입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본성은 신성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허구에 사로잡혀 사랑의 제한된 의미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한 육체가 다른 육체를, 혹은 주변의 몇몇 선택된 육체만을 보살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여러분이 하는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의 상태에 있을 때 여러분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인식하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은,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이 아닌 다른 존재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여러분의 본질이며 여러분의 존재 자체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근원자가 여러분에게 부어준 본연의 자질입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존재가 창조됩니다. 

- pp. 25~26

 

7장 마스터 되기

 

이번에는 마스터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마스터는 진정한 ‘신의 사람’입니다. 예수와 붓다를 포함한 위대한 스승들이 마스터로 불렀지요.

 

마스터는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하나가 되고자 하는 필연적 요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마스터가 되기 위해 여러분은 먼저 자기 삶의 마스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깊은 차원에서 자신이 늘 진행 중인 신성한 과정의 일부임을 알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스스로가 눈여겨보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 정신의 영역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의식 세계에 두려움의 영역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그런 영역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을 탐색하지 않아 그 에너지의 마스터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스터가 된다는 것은 기술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인간관계를 두려워한다고 해 봅시다. 여러분은 관계를 잃게 될까 두려워 관계를 맺는 것 자체를 꺼려합니다. 관계가 어긋나면 소외감과 고독, 황폐함 등을 느끼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러분은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이곳의 마스터가 아님을 안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다음 단계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의 마스터가 되는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대개의 경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호수의 표면을 건드리지 않고 잔잔하게 만들어 본 후, 그 방법이 별 효과가 없으면 다른 방법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다른 해결책을 시도할 때마다 또 다른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전에도 수없이 실패했기 때문이지요. 실패가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성실한 탐구자라면 자신이 두려워하는 이유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자기 내면의 패턴에 접근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조금만 묵상해 보면 갈등과 두려움을 일으킨 인생의 주요 사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건들은 누군가가 책에 기록한 것이 아니어서 정보를 얻기 위해 누군가를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정보는 언제나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그 정보들이 사념에 불과한 것이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회의감이 밀려들고, 여러분은 굴복하고 말지요. 진정한 마스터는 회의감이 일 때 "안 돼."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발견하여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절실히 원하기 때문이지요.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도구로 이용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성찰을 통해 두려움의 전모와 느낌을 접할 수 있고, 따라서 두려움의 면모를 낱낱이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움의 생김새에 친숙해지는 것이지요. 이렇듯 일단 두려움의 얼굴을 보고 나면 여러분은 비로소 두려움 없는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두려움을 다루는 방법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즉시 자신에게 “두려움의 느낌이 어떤가?”라고 질문하십시오. 두려움은 어떤 느낌, 혹은 색조를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육체 속 한 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존재는 아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마음이 그 느낌을 감지하고서 설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그 느낌에서 달아나려고 합니다.

 

지금껏 여러분은 두려움과 함께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두렵다는 느낌과 마주 앉아 있을 때, 문득 여러분은 두려움이 자신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두려움은 분명 존재합니다. 여러분도 그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 안에 두려움과 전혀 연관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일단 이런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면 두려움을 이해할 때까지 그 두려움과 함께 있을 용기를 얻게 됩니다. 자신의 전부가 두려움이어서 자기 안에 두려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생명은 그런 철저한 공포와 맞닥뜨리면 견뎌 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 엄청난 양의 파워와 안정감, 자비, 심지어 유머까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사정은 달라집니다. 그것은 마치 손가락에 상처를 입었다 해도 신체의 다른 부분은 지극히 정상인 것과도 같습니다. 손가락을 다쳤다고 해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가락을 제외한 다른 부위가 온전하기에 용기와 자신감을 일으킬 수 있어서지요. 

 

여러분은 상황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두려움이 자신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로 인해 상처 입기가 쉬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큰 존재임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면, 여러분을 감싸고 있는 ‘지혜’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공포에 휩싸이면 명확히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럴 경우 머리에 맴도는 것은 오직 탈출뿐이겠지요.

 

하지만 여러분은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릅니다. 마스터는 그 방법을 알고 있지요. 여러분이 두려움과 더불어 고요히 머물며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자기 존재의 나머지 부분을 소집할 경우, 두려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시도를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 말이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이 되는 것, 마스터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의 방법입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만 마스터로 있어선 안 됩니다. 끝없이 진행되는 삶의 토대에서 마스터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두려움이든 빙산의 꼭대기와 같습니다. 그 밑으로 여러분이 모르는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습니다. 작은 두려움까지도 조사한다면, 두려움이 자신에게 진정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개인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의 조각들이 스쳐 가도록 두지 말고 꼼꼼하게 조사하십시오. 그렇게 하다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해답을 얻기 위해 주위에 있는 지혜를 두루 찾을수록 상황은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기꺼이 스트레스로 뛰어듭니다. 그것은 마스터가 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진해서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라는 내면의 소리를 용기 있게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달콤하고 평온한 것은 깨우쳤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만족할 수 있도록 장기의 말판을 잘 고정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러분 스스로 말판을 움직이거나 여러분의 참자아가 여러분을 위해 말판을 움직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삶을 일정 기간만 평온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참자아는 여러분에게 끝내지 못한 경험이 있음을 알리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참자아는 여러분이 멋지고 평온한 삶을 살도록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참자아는 여러분의 장기판에 회오리를 일으킬 엄청난 바람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러면 장기의 말판들은 여기저기 흩어지겠지요. 

 

축하드립니다. 이제 여러분은 문제를 갖게 되었으니까요.

 

다음에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기 위해 장기 말판이 날아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알았을 것입니다. 장기 말판은 여러분의 관계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직업, 건강, 혹은 그 외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혹은 소파에 파묻혀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너무 편안하기 때문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그 다음 단계입니다. 여러분은 무의식적으로 혹은 자동 반응하는 로봇처럼 살도록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삶의 목적은 참자아를 향해 계속 나아가고 그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스터는 정신의 모든 영역을 경험하고 그것과 마주 서는 사람이며, 그 어떤 것도 외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어진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처참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모든 것을 철저히 품는 것이죠.

 

여러분은 자기 삶이 정돈되어 있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것이 답답하고 지루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답답하고 지루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엔가 해결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날마다 깨어남을 미룬다면 여러분의 삶은 계속해서 정체되어 있을 것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다섯 살 때나 여든 살 때, 혹은 그 중간에 정체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움직임은 여러분이 육체를 벗어날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그 흐름은 끝까지 계속됩니다. 따라서 어느 때든 활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정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필요한 변화를 위해 가정을 송두리째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달려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두려움으로 인해 움직이길 거부하는 곳이 어디인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변화가 생기면 삶이 불확실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멈춘 곳이 어디입니까? 두려움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두려움을 찾지 마십시오. 일단 두려움을 의식의 영역으로 가져온다면, 여러분은 도망가지 않을 것입니다. 두 가지 게임을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의식과 무의식 둘 다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쪽이든 저쪽이든 움직임이 시작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문제가 생긴다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이른바 문제라는 것을 통해 여러분이 마스터가 되어 갈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저마다 벗겨 내야 할 두려움의 장막이 있습니다. 그 장막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맞설 때 걷어 낼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어디서 생겨나는지를 이해해야 마스터가 됩니다. 두려움의 이유를 이해하는 순간 여러분을 옭아맸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어떤 실타래는 이번 생 너머까지 이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빈곤을 두려워한다고 해 봅시다. 당장 굶어 죽는 것도 아닌데 가난을 걱정하는 식이지요. 그 두려움은 이번 생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자신을 더 큰 존재로 바라보십시오. 지금 존재하는 자신이 여러 생에 걸친 수많은 경험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설명 불가능한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이해 할 더 넓은 공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두려움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다른 시간과 장소로부터 나온 이미지와 느낌들을 여러분 의식 속으로 불러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가장 이성적인 부분까지도, 인도에서 기아로 죽어 가던 어린 소년으로서의 자신과 현재 자신의 모습과의 괴리를 이해할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안다면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을 의식 속으로 가져 오지 않은 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근거도 없이 생겨난 경제적 두려움을 완화하는 방법은 일거리를 많이 갖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의 진원을 찾아 들어가 과거의 두려움과 현재의 삶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때 해결됩니다.

 

질병으로 인한 두려움도 한순간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의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면 현재의 질병에 관한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지요. 문제는 과거의 질병에 대한 기억이나 느낌들이 현재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를 살아가며 질병과 마주한다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상태’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잊어버렸습니다. 어떤 질병이든 시간과 상황에 적절하기 때문에 일어나며, 삶의 모자이크에도 완벽하게 들어맞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자신의 삶이 대단히 멋지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삶이라 하더라도 심오하고 궁극적이며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재 상황에서 생겨나지 않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억누르는 과거 두려움에 대한 기억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이와 똑같은 일이 인간관계에서도 발생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향해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이별에서 오는 두려움에 맞서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매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전 관계에서 연유한 상실의 아픔에 몸서리칠지도 모릅니다. 그 기억이 이별의 타당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 기억들을 자기의식 속으로 가져오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그것이 현재 상황에서 기인한 것인지 혹은 과거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현재와 과거의 복합물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어떤 어려움에 처하든지 자신에게 필요한 명확성을 얻기 위해 모든 힘을 집중해서 온전히 순간에 존재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짐을 덜어 주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요? 이 지구 행성에 들어온 모든 실체들의 오라 안에는, 삶이 전개될 때 그것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데 대한 광대한 지혜와 이해가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그 지혜는 언제든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삶이 ‘정당한 것’이라는 느낌은 두려움의 짐을 덜어 줍니다. 그 지혜를 그리스도 의식, 불심, 신성한 이해, 신 등으로 표현합니다. 물론 다르게 표현해도 상관없습니다. 바로 그 지혜는 여러분 존재의 완전함, ‘지금’ 여러분 존재의 온전함을 아무런 왜곡 없이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그것과 함께 머물면서 자신이 완전함을 이해하려고 결심할 때 더 큰 비전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 비전은 명확하고, 강력하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를 위해 ‘깨달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는 “깨달은 자만 내게 오라. 그들 새롭게 하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 이해가 지극히 부족한 사람들을 찾아갔지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초청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 중에는 아마 박사가 없었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초점을 맞추면, 여러분은 자신의 거대한 존재를 볼 수 없습니다. 어려움에 처했을때, 명확함과 해방과 이해,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구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없애 주기를 더 이상 바라지 않고 그것과 함께 머문다면, 그 어려움이 자신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고 마침내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혜와 자기 존재의 깊이로 인해 여러분은 어떤 계획이든, 어떤 두려움이든, 어떤 상황이든 수용할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인식을 통해 여러분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끌어안으며 심지어 그것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근심, 고통, 두려움 같은 것은 도무지 즐기지 못합니다. 이 원치 않는 느낌들을 스스로에게서 떼어 놓음으로써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력의 일부를 잘라 버립니다. 그 모두를 수용하여 자신의 마스터가 되십시오. 그런 두려움을 받아들여 삶 속으로 통합하지 않는 한, 삶을 반쪽짜리라고 느낄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놀라운 생명의 힘은 항상 존재합니다. 두려워하면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자발적일 수 있으며 어찌 가슴을 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두려움을 향해 마음 열기를 겁내고 있습니다. 일련의 어둠이 몰려와 자신을 압도하고 고립시킬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대부분은 새로운 상황이나 낮선 생활 방식으로 옮겨 갈 용기를 이미 지니고 있습니다. 주의를 집중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지금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의식을 자기 내면에 집중하고 매일 순간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두려움을 일으킨 상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두려움이 현재 상황과 전혀 상관없이 일어났다면 왜 그랬는지를 말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데 아직 얻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필요한 것을 물질적인 대상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더 많은 사람이나 사랑, 혹은 돈 같은 것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 줄 무언가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갔는데 면접관이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면 불안해지겠지요. 그럴 경우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면접에서 탈락하여 자신이 무가치하고 무능한 존재임이 드러날까 봐 두려운 것일까요? 그런 두려움이 과거의 탈락에서 유래된 것임을 이해한다면 현재 느끼는 두려움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 일자리를 얻느냐 못 얻느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면접관이 여러분을 가치 있게 보느냐 보지 않느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요? 여러분이 아닌 다른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그토록 괴로운 일인가요? 여러분이 구하고 있는 것이 ‘타인의 인정’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그런 특수한 정황을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경험이 전혀 없는 직종에 지원할 때조차도 자신이 채용되지 않았을 경우 버림받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우주의 모든 존재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 싶군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반으로 줄이십시오. 인정받을 때와 인정받지 못할 때가 50 대 50 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것은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최소한 인생의 50퍼센트는 편안하게 지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사람은 항상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처럼 능력과 지혜를 갖춘 사람도 극히 적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는데, 왜 자신이 그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어려운 일이며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반드시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아야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인정을 받아야 할 존재는 단 하나뿐입니다. 

 

바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입니다. 

 

용기 있게 내면을 들여다보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완벽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수용은 길을 막고 부탁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여러분을 온전히 받아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품어 주는 의식의 바다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지요. 그곳이 바로 여러분 삶의 중심점입니다. 

 

온 세상이 여러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것입니다.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 온 세상이 여러분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세상이 자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전혀 모를 것입니다. 

 

자신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온 세상을 넉넉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질문: 최근 몸이 아픈 동안 나는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무한한 창조자에게 마음을 집중하자 두려움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나는 현실도피자일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 계속 그렇게 하도록 권합니다. 도피가 아니라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안 행동이지요. 극단적인 어려움에 처할 때 ‘은총’이라는 것이 임하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은총을 기다리고 앉아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로 여러분이 스스로 ‘은총’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은총의 근원자는 무한히 자비롭습니다. 

 

여러분을 고양하고 변형하기 위해 때때로 에너지를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날마다 하루같이 기다렸는데도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정체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스터라면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움을 다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여러분이 두려움과 함께하면서 그것을 느끼고 그것을 친구로 삼으면, 그 두려운 경험이 여러분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달아나면,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배우지 못한 채 두려움의 결과만을 맛보게 됩니다. 용기를 갖고 꾸준히 확고한 마음으로 머무십시오. 그러면 유쾌해질 것입니다. 자기 집의 주인이 되었다는 생각에 흐뭇해집니다. 그런 기분은 여러분에게 힘을 주는 자기 존재의 거대한 부분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하더라도 스스로를 돕기 위해 자기 존재의 모든 힘을 불러낼 권리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그 힘은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습니다. 삶의 정황이 어떠하든 평화는 여러분이 날 때부터 지닌 권리입니다. 어떤 곤경에 처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누가 자기 집의 주인이 되길 바랍니까? 두려움입니까, 여러분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절대적 의미나 깊이, 그리고 목적이 없이는 여러분에게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려움일랑 ‘한 손가락’에 싸매어 두고 두려움을 밝히기 위해 스승을 찾는 습관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아니기 때문에 길을 가리키는 정도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마스터가 되어야 합니다. 

 

일단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면 삶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환영할 수 있으며 어떤 불행이라도 은총으로 다가옵니다. 삶에서 겪는 모든 행위와 경험들은 참자아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해 주는 과정이 됩니다. 

 

친구들이여, 참자아를 이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질문: 두려움을 풍요에 대한 비전으로 바꾸어 그 풍요가 현실화되도록 할 수 있습니까?

 

썩 권하고 싶지 않군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풍요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참자아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즉,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행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자아를 진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 더 많이 진화합니다. 안락한 상태에 있으면 에너지가 고이기 쉽지만 곤경에 처하면 흘러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놓인 문제들을 이해하고 자신의 영적 진화를 위해 그것을 이용하십시오. 

 

풍요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찾으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내적 자아가, 자신은 가난 속에서 더 많이 배운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다시 가난해질 것입니다. 자기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갖고 있고, 많은 생을 풍요로움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가난과 부, 질병과 건강, 살인과 살해당함이라는 삶의 이원성 속에서 이 모두를 경험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스펙트럼 전체가 필요합니다. 

 

가난한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면 그것은 아주 잘된 일입니다. 그런 두려움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질 때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풍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는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구 행성에서 돈과 물욕을 극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는 여러분에게 너무 많은 선택권을 주어 극심한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삶을 달콤하게 만들어 주는 완충장치를 너무 많이 제공하여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망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가난을 둘러싼 두려움에 관한 뜻 깊은 가르침을 배운다면, 풍요가 저절로 흘러들어 올 것입니다.

 


질문: 건강에 초점을 맞추면 질병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나요?

  

“나는 건강하다고 믿는다.”라고 말하면서 건강에 초점을 맞추는 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병을 두려워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못하면 보이는 것은 오직 질병뿐일 것입니다. 병에 걸리는 것이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가난한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그 어떤 것도 그릇된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경험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건강해지고 부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그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자아가 여러분에게 질병이 나타나도록 한 이유를 먼저 이해하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내면에는 밝히고 풀어야 할 깊은 두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해소될 경우, 두려움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매순간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을 다룰 준비가 갖추어집니다. 

 

언제든 자기 두려움의 뿌리를 뽑아 버리면 그것으로 배움은 끝납니다. 

 

각자에게는 배울 것이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모두가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같은 교훈을 배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경험을 완결지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경험들은 근본적인 두려움이 제거되지 않는 한 끝을 맺지 못할 것입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하는 것이 여러분을 건강으로 이끌 것입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꺼내어 그것과 맞설 때 여러분은 스스로 마스터가 될 것입니다.


누가 자기 집의 주인이 되길 바랍니까? 

두려움입니까, 여러분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절대적 의미나 깊이, 그리고 목적이 없이는 

여러분에게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꺼내어 그것과 맞설 때 

여러분은 스스로 마스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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